부산에서 3대째 이어오고 있는 기업 삼진어묵의 창업과 위기, 소설 커머스 진출과 어묵 베이커리 등을 소개합니다.
삼진어묵의 창업주 박재덕
박재덕은 1940년대 일본에 강제 징용 되었다가 일본에서 해방을 맞이합니다. 그는 홋카이도에서 일할 때 어깨너머로 배운 어묵 기술을 살려 부산에서 어묵 제조를 시작합니다. 어묵 제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일어났고,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묵이 전쟁으로 부족한 식량 속에서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기 때문에 어묵을 찾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 결과 어묵 공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도 박재덕의 삼진어묵은 어육의 함량을 75% 이상을 고집했습니다. 어묵은 밀가루 함량이 높아지면 탄력도 떨어지고, 퉁퉁 불어서 맛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영양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진어묵은 창업 초기부터 어육의 높은 함량을 절대적으로 지켜 왔습니다. 또 냉동 연유뿐만 아니라 생육을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어획량이 많은 해에는 생육 비율이 더 높아서 어묵의 맛이 더 좋습니다. 삼진어묵은 항상 좋은 재료를 고수했습니다. 1950년대 어묵은 맷돌에 생선을 뼈째 갈아서 기름솥에 튀기는 방식이었습니다. 고급 어묵은 식용기름으로 튀겨서 시내 요릿집에 납품되었고, 저렴한 어묵은 고래기름이나 전갱이 기름으로 튀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밀가루가 비싸다 보니 콩비지를 섞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으로 외식 산업이 성장하면서 어묵의 품질이 좋아졌고 어묵은 국민 간식 국민 반찬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묵 수요가 많아지면서 부산 지역에 많은 어묵 공장이 생기고 설비가 자동화, 대형화됩니다. 삼진어묵은 창업주인 박재덕 사장이 30년간 운영하던 공장을 아들 박종수가 이어받았습니다. 박종수는 본격적으로 생산 생산과 포장 설비를 구축하고 브랜드 이름을 '부산 어묵'으로 바꾸면서 작은 공장을 매출 20억 원의 규모로 키워냅니다. 좋은 어묵을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30년간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해서 쉬지 않고 일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었습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새로운 먹거리가 계속 쏟아져 나왔고 어묵의 인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먹거리 고발 프로그램에서 일부 불량한 어묵 공장을 고발하면서 어묵은 안 좋은 생선으로 비위생적으로 만든다는 인식이 팽배해졌습니다. 결국 소비자들은 점점 백화점이나 마트로 넘어갔고 어묵 시장은 점점 대기업이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삼진어묵의 젊은 CEO 박용준 회장
이렇게 어묵 업계와 회사가 어려워질 즈음 3대가 등장하니 바로 손자 박용준 현재의 삼진어묵 회장입니다. 삼진어묵을 키운 젊은 CEO로 유명한 박용준은 원래 가업을 절대 물려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박용준은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를 마치면 매일 어묵 공장에 가서 기계에 낀 찌꺼기를 청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 별명이 늘 어묵이었고 부모님의 힘든 모습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어묵공장을 물려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회사원이 되고 싶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뉴욕 주립대 회계학과를 졸업하고 회계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회사가 폐업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유학을 마치고 29살의 나이로 아버지 회사를 이어받게 됩니다. 박용준이 회사에 입사해 보니 상황은 더 안 좋았습니다. 20명 남짓한 직원들이 과거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었고, 빚이 산더미였습니다. 그는 장부와 회계를 시스템화하고 위생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공장에 들어가려면 위생복도 입고 소독도 하도록 바꿨습니다. 하지만 그를 어릴 때부터 봐온 오래된 직원들은 '시스템을 바꿀 게 아니고 영업이 우선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등을 떠밀었습니다.
삼진어묵의 소셜커머스 진출
박용준은 거래처 한 군데라도 더 납품하기 위해서 서울의 도매상들을 찾아다녔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이때 '소셜커머스'가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당시 할인 쿠폰을 판매하는 소셜커머스 커머스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경쟁을 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박용준은 소셜커머스 업체에 새로운 어묵을 선보이겠다며 제안서를 보냈습니다. 그가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어묵 초콜릿을 개발해 소설커머스에서 선보였습니다. 소셜커머스는 업체에 지불해야하는 수수료가 15%가 넘어서 많은 수익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단 며칠 만에 2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홈페이지 회원 3만 명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삼진어묵의 연매출이 20억 원이었으니 매우 큰 금액이었습니다. 마진은 얼마 안 남았지만 삼진어묵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면서 매출이 전년 대비 두 배를 달성합니다. 박용준의 젊은 패기와 아이디어가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때부터는 삼진어묵은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합니다. 그동안 어묵은 똑같은 맛에 비슷한 모양으로 특색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박용준은 그동안 써온 부산 어묵이라는 이름을 과감히 버리고 회사의 이름을 딴 삼진어묵으로 제품 이름을 바꾸고 디자인도 깔끔하게 바꿉니다. 그리고 기존 어묵이 납품하던 도매상들이 아닌 일반 고객 위주로 판매 전략을 바꿉니다. 처음에는 부산의 전통시장 4군데를 돌며 직접 영업을 했습니다. 하지만 전통시장에서 굳이 비싸고 좋은 어묵을 찾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삼진어묵 베이커리
그래서 새로운 유통 채널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추석에는 선물세트를 만들어서 신문에 광고를 하고 백화점, 기차역, PC방까지 진출합니다. 그리고 오프라인 매장을 만들어 반찬으로 인식되던 어묵을 프리미엄 간식으로 바꾸기 위해 색다른 시도를 선보입니다. 2013년 오픈한 '삼진어묵 베이커리' 어묵 가게를 빵집처럼 만들었습니다. 갓 튀겨진 어묵을 빵집처럼 바구니에 담아서 자리에서 먹거나 포장해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위생적인 조리 과정을 보여주는 오픈 주방을 만들고 갓 나온 어묵을 시식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때 어육의 비율은 90%까지 끌어올리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합니다. 고추튀김 어묵, 새우말이 어묵, 단호박 어묵 등 30종의 어묵을 선보였습니다. 특히 감자, 고구마, 카레, 고추의 4가지 맛 어묵 크로켓은 대박이 나서 삼진어묵의 시그니처 상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테리어도 편안한 유럽 빵집처럼 바꿨습니다. 이때부터 삼진어묵의 매출이 급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부산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열린 삼진어묵 특별전에는 20일 동안 4만 5천 명이 몰려서 줄을 길게 늘어섰습니다. 현재는 삼진어묵 매장이 20여 개 분식류로 먹을 수 있는 '삼진어묵당'이라는 브랜드로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용준 대표는 '어묵 베이커리'의 성공으로 어묵계의 스티브 잡스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여러 가지 실패가 많이 있었습니다. 특이한 메뉴들을 만들었다가 무수히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여러 개의 어묵 프랜차이즈를 만들었다가 호응이 없어서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또 사고도 있었습니다. 한 백화점 매장에서 변질된 어묵을 물에 씻어서 판매했다가 문제가 적발되었습니다. 이 일로 박용준 대표는 직접 사과하고 먹거리 안전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이런 위기와 변화에 대해 박용준 대표는 혁신을 하려고 여러 가지를 바꿨지만 중요한 것은 어묵의 본질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삼진어묵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베이커리를 처음 연 2013년에는 83억 원, 2023년에는 830억 원으로 10년 만에 매출이 10배 늘어났고 아직도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10년 만에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박용준 대표는 시대가 바뀌어도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제공하면서 기업의 본질을 잃지 않겠다고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 철학이 오래도록 이어져서 삼진어묵이 건강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100년 기업을 이어가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