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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롤리움 젤리 바세린의 발견과 대중화

by 아이스 야쿠르트 2024. 10. 8.

바세린은 150년 역사를 가진 브랜드로, 피부를 촉촉하게 보호해 주는 제품으로 유명합니다. 바세린은 브랜드명이지만, 원래는 '패트롤리움 젤리'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다양한 브랜드에서 제조됩니다. 바세린의 제조와 대중화 과정, 효과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바세린

 

바세린의 발견

바세린을 처음 대중화시킨 사람은 과학자 로버트 체스브로입니다. 1837년 영국에서 태어난 로버트 체스브로는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뉴욕대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고래기름을 정제하는 일을 맡게 되었고, 이 기름은 램프의 연료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1859년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고래기름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로버트는 석유 시추 현장에서 인부들이 석유 찌꺼기인 '로드 왁스'를 상처 치료에 사용한 것을 보고, 이 물질이 상처 치료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년간 연구 끝에, 그는 석유에서 밝은 색상의 젤리인 패트롤리움 젤리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고, 이것이 바세린의 원료가 되었습니다. 바세린은 현재까지도 순수 석유에서만 추출되는 방식으로 제조됩니다.

 

바세린의 대중화

로버트 체스브로의 바세린 이전에, 사무엘 키어라는 과학자가 이미 석유를 치료 목적으로 제품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무엘 키어는 암염을 정제하는 중에 나오는 검은 액체가 불이 붙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오일로 인식했습니다. 그는 이 오일을 의학적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여 '세네카 오일'을 만들었지만, 너무 흐르고 불편해서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제형을 굳혀 피부에 바르는 연고인 '탈출올리온 버터'를 만들었고, 이는 바세린과 매우 유사한 제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키어의 제품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가 특허를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북미의 인디언들이 이미 전통적으로 이 물질을 치료제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배려해 특허를 포기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과학자는 마케팅에 약해 사람들에게 제품의 필요성을 제대로 어필하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반면, 로버트 체스브로는 사업가적인 감각을 갖춘 과학자로, 제품의 효능을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마케팅하여 바세린을 대중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체스브로는 바세린의 특허를 등록하고 대량 생산을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마차를 랩핑하고 작은 병에 담긴 바세린을 전국에 나눠 주었으며, 무려 50만 병 이상을 배포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피부에 화상을 입히거나 상처를 내어 바세린의 치료 효과를 직접 시연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용한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며 바세린은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바세린의 효과와 인기

하지만 후에 밝혀진 것이 바세린 자체에는 치료 효과가 없고, 얇은 막을 형성해 감염을 방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피부 보습 용도로 사용할 때도, 먼저 충분한 수분을 보충한 후 발라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1874년, 바세린은 1분에 1개씩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으며, 사람들은 이를 만능 치료제로 믿고 일부는 먹기도 했습니다. 바세린은 1875년 영국에 진출해 빅토리아 여왕이 매일 사용하며 사랑받았고, 로버트 체스브로는 여왕 덕분에 기사 작위를 받았습니다. 로버트는 50대 중반에 늑막염에 걸려, 바세린을 온몸에 바르고 치료했다고 주장하며, 이후 96세까지 장수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는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으며, 바세린 섭취는 의학적으로 근거가 없습니다. 바세린은 석유에서 추출된 제품으로, 석유 가공 과정에서 안전성을 확보한 뒤 시중에 판매됩니다. WHO는 1등급 미네랄 오일이 인체에 무해하다고 밝혔지만, 과용하거나 잘못 사용할 경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눈가, 입, 콧구멍 등에는 사용을 피해야 하며, 의사나 약사의 처방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세린은 1800년대에는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었지만, 현대에는 주의 깊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세린이 세계적으로 퍼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 미국은 연합군에 가담하면서 유럽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 미국 내 보급품에 바세린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휴대하기 편한 튜브형이었습니다. 이 제품이 화상을 입거나 상처를 입을 때 또 딱딱한 군화가 발을 다치게 할 때도 매우 유용했습니다. 영국에도 바세린이 있긴 했는데 보급품으로는 안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군이 미군에게 담배와 바세린을 교환하자라고 했을 정도로 전쟁에서 인기 품목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유럽 전역에 퍼지고 미국에서도 더 큰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이렇게 의약품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바세린 이제는 자연스럽게 화장품 영역으로 자리를 넓혀갑니다.

 

유니레버와 합병 후 사회기여

바세린의 강력한 라이벌은 폰즈 컴퍼니였고, 폰즈는 식물 추출물로 화장품을 만들었습니다. 이에 체스브로 컴퍼니는 폰즈를 합병해 유통망을 공유하며 글로벌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바세린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인도 등으로 확장되었고, 한때 인기 있었던 바세린 헤어토닉은 화장품 이미지에 방해가 되어 단종되었습니다. 이후 바세린은 인텐시브 케어 로션과 핸드 트리트먼트를 출시해 화장품 시장에서 자리잡았고, 1986년 유니레버와 합병하여 세계적인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니레버는 최근 10년간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개선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해왔습니다. 바세린은 2015년부터 '바세린 힐링 프로젝트'를 통해 소외 지역에 의료용품과 바세린을 지원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큰 질병 예방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2030년까지 매년 300만 명에게 도움을 줄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150년간 우리의 피부를 보호해 온 바세린이 앞으로도 건강하게 브랜드를 잘 운영해 나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