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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가문의 GS 그룹, 창업주 허만정 선생

by 아이스 야쿠르트 2024. 9. 18.

독립운동을 안팎으로 지지해 온 집안 GS. 창업주 허만정 선생의 끝없는 독립운동 이야기, 그리고 GS 허 씨 가문과 LG 구 씨 가문의 그룹 경영과 분리 과정 등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GS

 

1. GS의 창업주 허만정 선생의 독립운동

2004년 GS가 LG에서 분리되면서 GS는 허만정 선생을 창업주로 추대하고 있습니다. 허만정은 1897년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대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허만정의 아버지 허준은 관직을 하다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 재산을 자손에게 다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해서 재산을 가문에 헌납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학당에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강직한 아버지 아래서 자란 허만정은 17살에 이미 독립운동을 하는 조직에 주주로 참여해서 큰 자금을 투자합니다. 그 조직이 바로 백산상회입니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가인 안희재 선생이 세운 기업인데 겉으로는 곡물과 해산물 면직 국물을 파는 회사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독립운동의 연락망을 담당하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위장 기업이었습니다. 백산상회는 독립군의 은행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해 임시정부에 많은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1919년 조선 국권 회복단 운동이 발각되면서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회사 간부들은 감금과 고문을 당하다가 1928년 결국 해산되었습니다. 백산상회는 경제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한편, 허만정은 20살이 되던 해에는 전국을 유람하고 일본에 가서 개화된 문명을 보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기 위해서 서울에 방문했을 때 3.1 만세운동을 목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목숨을 잃는 것을 본 허 선생은 우리가 인재를 양성해야만 일제강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고향으로 오자마자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진주에 학교를 설립합니다. 1925년 논 9만 3천 평, 밭 3만 5천 평과 현금 7만 원을 재단 설립 기금으로 출연하여 일신여자보통학교가 개교했고 현재는 진주여자고등학교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 밖에도 1920년대에는 주일상회, 협성상회, 경남 십상은행까지 여러 회사의 발기인으로 투자해서 사업에 참여합니다. 민족 자본의 양성을 위해서 여러 기업에 투자를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해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 충렬사가 낡아서 붕괴를 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의 눈치를 보며 꺼렸지만 허 선생은 당당하게 공사비를 기부하면서 일본 감시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1923년에는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인 진주형평운동을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만석꾼의 아들이 백정 운동을 도와줬다라면서 사람들에게 회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신문사인 중외일보를 창간하고 부사장을 지냈습니다. 이 신문은 계속해서 일본에 저항적인 기사를 내서 조선총독부에 시달리면서도 계속해서 목소리를 낸 언론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허만정 선생은 본인이 가진 재산을 우리나라가 부국강병해지는 일들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2. GS 허 씨 가문과 LG 구 씨 가문의 만남

허만정 선생은 그렇게 염원하던 광복이 되고 난 후에도 계속 사업에 투자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셋째, 아들 허준구의 손을 잡고 부산에 있는 사돈을 찾아갔으니 그 사람이 바로 LG의 전신 구인회 창업주입니다. 원래는 구 씨와 허 씨 모두 진주에서 유명한 지역 유지였습니다. 구인회 창업주가 허가의 허을수 여사와 결혼을 하면서 허가의 집안사람이던 허만정 선생이 투자를 하고 싶다며 구인회 창업주를 찾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모든 사업에서 구 씨와 허 씨의 지분율은 65대 35의 비율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허만정 선생은 아들을 부산에 남겨두고 돌아오면서 경영은 구 씨가 알아서 할 테니 처신을 잘하고 돕는 일에 충실하라고 아들에게 당부합니다. 이렇게 해서 구 씨 집안은 대외적으로 경영을 하고 허 씨 집안은 주로 재무나 안살림을 챙기면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 허준구가 아버지 손에 끌려 부산으로 갔을 때 구인회의 무역사업은 아주 작았습니다. 목탄이나 농기구 등을 일본에서 수입해서 팔았는데 사업이 그다지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허준구가 합류한 이후에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고, 이때 출시한 '동동구리무 럭키 크림'이 대박이 납니다. 럭키 화학공업사를 세우고 화장품을 담기 위해 플라스틱 용기도 직접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허준구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였지만 직접 공장을 뛰어다니며 제작을 하고 밤새 포장 작업을 했습니다. 또 럭키 치약을 개발했을 때는 리어카를 끌고 부산 국제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판매를 담당했습니다. 그는 숫자에 밝아서 회계를 도맡았는데 한때 럭키그룹 기획조정실 기획조정실장으로 2인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권한을 지녔음에도 아버지의 말을 따라 묵묵히 구 씨 집안을 서포트했습니다. 허준구의 별명은 은둔의 경영자였는데요.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언론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50년 넘게 LG 그룹의 발전에 기여한 허준구는 1995년 구본무 회장이 취임하고 럭키화학이 LG로 사명이 바뀌면서 후배들을 위해 경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3. 마케팅의 귀재 허신구

럭키화학이 점점 커지면서 다른 허 씨 가족들도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그중 LG의 혁신에 크게 기여한 허만정의 넷째 아들 허신구는 원래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의 한 해운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이때 구인회가 부산에서 서울로 사업장을 옮기면서 조카사위인 허신구 불러 럭키화학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입사 후에  두 가지 상품을 크게 히트시켰는데, 첫 번째는 국내 최초의 합성세제인 하이타이입니다. 그전에는 빨래할 때 한국에는 비누만 쓰고 있었습니다. 하이타이가 먼저 출시되고 얼마 뒤에 세탁기가 보급되었는데 하이타이가 곧 세탁세제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는 플라스틱 창호 하이샷시를 개발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주로 창틀은 나무 철제를 썼었는데 나무는 강도가 약하고 철재는 녹이 슬고 알루미늄은 단열에 약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한 번에 해결한 플라스틱 창틀 하이샤시를 내놓으면서 대한민국의 창틀을 모두 바꿨습니다. 그리고 또 허신구는 마케팅의 귀재로 유명했습니다. 허신구가 럭키그룹의 핵심 계열사이자 전자제품을 만드는 금성사 사장으로 있던 1980년대는 유류 파동 때문에 경기 불황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허신구 사장이 아이디어로 가전제품이 필요한 예비부부를 대상으로 파격 이벤트 실시했습니다. 예비부부가 제품을 외상으로 구매하고 대금을 분할로 납부할 수 있도록 해준 금성허니문 세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신용카드 할부가 있지만 당시에는 할부 개념이 없었습니다. 이 이벤트는 가전제품을 한꺼번에 사는 게 부담이 되는 신혼부부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당시로서는 또 가전업계 최초의 판촉 캠페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케팅과 신제품 개발의 귀재 마케팅과 신제품 개발의 귀재로 불리던 허신구는 1970년 금성전선 사장, 1971년 럭키화학 사장을 역임하며 LG그룹의 핵심 계열사를 이끌었습니다.

 

4. LG와 GS 그룹의 분리

이렇게 허 씨와 구 씨 집안은  50년 넘게 나란히 사이좋게 회사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계열사가 너무 많아지고 복잡해지면서 자연스레 이별을 결심하게 되는데, 놀라운 점은 두 집안의 분리가 갈등이 없이 평화롭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허씨 가문이 LG전선을 포기한 것이 화두가 됐습니다. LG전선은 송배선용 케이블을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허준구와 허신구 또 3대인 허창수까지 나란히 사장과 대표를 역임하면서 큰 회사로 성장시켜 왔기 때문에 굉장히 다들 의아했습니다. 허 씨 가문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허신구는 LG전선을 양보하고 정유 건설 유통 부문을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양보함으로써 두 그룹은 원만하게 분리됐고, LG와 GS는 지금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GS로 독립 후 크게 3개의 사업 부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편의점을 포함한 GS리테일의 매출이 약 15%를 차지하고 있고, GS 칼텍스, GS 에너지의 정유사업에서 50%, 자이 아파트로 알려진 GS 건설이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GS가 하는 사업들이 정유 외에는 대부분 내수 경제의 영향을 많이 받는 사업들이기 때문에 사업 발굴과 투자에도 적극적이고 많은 기업을 투자하거나 인수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만큼 이를 기리는 활동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2019년 GS 칼텍스는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독립운동가 5인의 필체를 서체로 제작하고 무료로 배포했습니다. 또 기부 마라톤 8.15런을 꾸준히 후원하고 있는데, 이 행사의 수익금은 독립유공자 후손의 주거환경 개선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GS 25 역시 그동안 독립운동가 알리기 캠페인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허만정 창업주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적 책임까지 다해 주는 GS를 기대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