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중에 금박의 포장지로 둘러싸여 있고 바삭함과 달콤함 그리고 고소함까지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고급 초콜릿 이 초콜릿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초콜릿 회사 페레로의 다양한 제품 개발과 기업의 위기, 사회 공헌 등에 대해 소개합니다.
페레로의 창업자 피에트로 페레로
페레로 그룹을 창업한 사람은 피에트로 페레로입니다. 피에트로는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야심도 크고 굉장히 성실했습니다. 처음에는 시내 제과점 수습공으로 일하다가 아내를 만나 이탈리아의 알바라는 도시로 이사하고, 빵 가게를 차립니다. 장사가 잘 되자 피에트로는 더 큰 도시 토리노로 가서 큰 페이스트리 가게를 오픈합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토리노는 갑자기 폐허가 되었고, 피에트로와 아내는 다시 알바로 돌아와서 작은 가게를 이어 나갑니다. 이렇게 한 번에 모든 것을 갑자기 잃었던 피에트로는 생각합니다. '밀가루는 유통기한이 짧고 전쟁이 나면 밀가루를 구하기가 어려워. 그리고 한 도시에서만 장사를 했다가 이번처럼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어. 전국에서 팔 수 있는 걸 만들어야 해. 우리 제품 중에서는 바로 초콜릿이 딱이야' 이렇게 해서 초콜릿 사업에 올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카카오의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그러자 피에트로는 잔두야를 떠올렸습니다. 잔두야의 탄생은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때도 유럽에서는 초콜릿을 많이 먹었는데 전쟁 때문에 카카오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그러자 헤이즐넛 산지인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주민들이 아이디어를 생각해 냅니다. 카카오 대신 헤이즐넛을 구워서 갈아 만든 페이스트에 초콜릿은 조금만 넣고 풍미를 내서 먹던 것이 바로 잔두야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잔두야는 잊혔고 사람들은 다시 초콜릿을 찾았습니다. 100여 년이 지나 피에트로가 다시 잔두야를 소환한 것입니다. 피에트로는 가게에 따로 실험실을 차리고 레시피를 연구합니다. 구운 헤이즐넛, 아몬드, 설탕, 코코아버터를 넣고 카카오콩은 20%만 넣었습니다. 그리고 잔두야를 호일에 싸서 판매했고, 사람들은 버터처럼 이걸 칼로 썰어서 빵에 발라 먹었습니다. 이렇게 잔두야가 잘 팔리자 피에트로 페레로는 1946년 드디어 회사를 차리게 되는데, 그 회사가 바로 페레로입니다.
이탈리아 북부 경제에 기여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빵에 발라먹는 초콜릿 버터에 가까웠습니다. 가격이 초콜릿의 4분의 1로 저렴해졌지만 풍미는 더욱 좋았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찾았습니다. 1년에 100톤 이상을 생산하면서 페레로는 이탈리아 북부 경제에 엄청난 기여를 합니다. 원래 이 지역에는 헤이즐넛이 많이 생산되긴 했지만, 수요가 없어서 값이 쌌습니다. 그런데 페레로가 잔두야를 팔기 시작하면서 헤이즐넛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게다가 피에스로는 농가를 돌면서 헤이즐넛을 심으라고 권했고 수확만 하면 전량 매수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많은 젊은이들을 고용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 않아도 됐습니다. 게다가 페레로는 농번기에 젊은이들에게 휴가를 줬습니다. 가족과 함께 농사를 돌보라고 배려를 한 것입니다. 이탈리아에서 포도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사람들은 페레로에 일하러 다니거나 헤이즐넛을 납품하면서도 계속 포도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 지역의 와인 산업도 활성화됩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롤로 와인과 바르바레스코 와인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페레로는 지금까지도 이 시골 마을인 알바에 계속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길을 가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페레로에서 일했거나,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페레로는 노동자 가족 중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치료 비용도 다 지원해 주고, 발 벗고 도와줬다고 합니다.
페레로의 다양한 제품 개발
이렇게 지역발전에 기여한 피에트로 페레로는 51세의 나이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을 합니다. 그래서 아들 미켈레 페레로가 23살에 가업을 이어받게 됩니다. 미켈레도 아버지처럼 엄청 성실했고 일 중독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현장을 뛰어다니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많은 제품을 개발합니다. 어느 더운 여름 날, 미켈레는 더위에 녹아 버린 잔두야를 발견하고 항아리에 옮겨 담습니다. 이걸 보던 미켈레는 아예 항아리에 넣어서 잼처럼 팔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부드럽게 녹인 잔두야 크림에 슈퍼크레마라는 이름을 붙여서 팔게 되었는데 대박이 납니다. 그러던 1962년 이탈리아에서 식품법이 하나 통과됩니다. 바로 'Super', 'Ultra' 같은 최상급 표현을 식품 이름에 붙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슈퍼크레마는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한 악마의 잼 '누텔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때 미켈레는 기존 레시피에 쓰던 카카오버터 대신 식물성 오일 혼합물로 대체를 합니다. 이 레시피가 코카콜라처럼 아무도 모르는 철저한 보안으로 비법이 전수되고 있습니다. 영국 가디언즈에 따르면 이 레시피에 대한 보안이 거의 미국 항공우주국 나사 수준이라고 합니다. 소문에 따르면 이 레시피를 아랍어로 바꿔서 이집트 카이로 어딘가에 숨겨놨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공장을 한 번도 공개하지 않고 철저한 비밀에 그쳤습니다. 경쟁자들이 누텔라를 따라 하려고 엄청나게 헤이즐넛 제품을 출시했지만, 지금도 따라올 수 있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1964년 누텔라는 흰색 뚜껑을 달아서 지금의 항아리 모양으로 통일했습니다. 또 이탈리아 전역을 휩쓸고 독일과 영국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1983년에는 미국에도 진출했는데 영화 비앙카에 나오면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미켈레는 계속 신제품을 선보였습니다. 초콜릿 속에 에스프레소를 넣어서 포켓 커피라는 제품을 만들었고, 위스키를 넣은 몽셰리라는 제품도 만들었습니다. 아 제품들은 지금도 이탈리아 가면 꼭 사 오는 쇼핑 필수템입니다. 또 이탈리아의 새콤달콤이라 불리는 틱택(tic tac)이 우리나라에서도 판매가 되고 있는데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캔디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페레로의 위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초콜릿이 우울증을 치료하고, 외로움을 달래주고, 또 아침에는 활력을 주는 특효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아침 식사를 초콜릿으로 대신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님들의 걱정이 높아집니다. 아이들이 살이 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켈레는 아이들의 비만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합니다. 그래 서 카카오를 줄이고 우유를 많이 넣어 크림 식감의 초콜릿을 만드는데요. 바로 1968년 선보인 킨더 초콜릿입니다. 킨더는 독일어로 어린이라는 뜻을 가진, 철저히 아이들을 위한 초콜릿입니다. 이 초콜릿은 130kcal 미만으로 만들었고, 여러 번 나누어줄 먹을 수 있도록 개별 포장을 했습니다. 이후 미켈레는 부활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초콜릿을 달걀 모양으로 만들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17세기 부활절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달걀에 초콜릿이나 사탕을 담아서 아이들에게 나눠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떠올린 미켈레가 킨더 초콜릿을 달걀 모양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제품의 이름은 킨더 서프라이즈. 초콜릿 안에 플라스틱 통을 넣고 그 안에 장난감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 들어가는 장난감도 직접 만들었습니다. 현재까지 장난감만 13,000 종 이상이 출시됐고, 킨더 서프라이즈는 300억 개 이상이 판매되었습니다. 그런데 킨 더 서프라이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1985년 북아일랜드의 3살 소년이 장난감을 삼키고 숨진 것으로 시작해 여러 아이들이 같은 사고로 숨지게 된 것입니다. 특히 소비자 보호법이 엄격한 미국에서는 킨더 서프라이즈가 절대 판매조차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달걀의 반으로 나눠서, 초콜릿과 장난감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한 킨더 조이라는 제품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페레로 로쉐의 탄생
킨더 초콜릿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페레로 이번엔 어른들을 위한 초콜릿을 만듭니다. 바로 1982년 출시한 페레로 로쉐입니다. 기독교 신자였던 미켈레는 어느 날 루르드 지역으로 순례 여행을 갑니다. 거기서 성모 마리아상을 보고 신제품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동그랗고 예쁘게 깎아진 바위틈에 예쁜 성모 마리아상이 있었고, 그 바깥의 암벽은 울퉁불퉁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고 통 헤이즐넛을 감싼 초콜릿, 그리고 겉은 울퉁불퉁한 바위 느낌을 닮은 페레로 로쉐를 생각한 것입니다. 로쉐는 프랑스어로 바위라는 뜻인데요. 이 느낌을 연출하기 위해 무려 5년간 숱한 연구를 합니다. 그리고 페레로 로쉐는 고급진 느낌을 주기 위해서 금박지로 포장했고, 광고나 마케팅도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진행합니다. 크리스마스를 비롯한 선물시장으로 포지셔닝을 해서 1년에 40억 개씩 판매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헤이즐럿 생산량의 25%를 페레로에서 소비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 결과 페레로는 이탈리아 최고의 부호가 됩니다. 구찌는 물론이고, 한국의 삼성의 자산을 넘는 규모라고 하니 초콜릿이 얼마나 많이 팔리는지 알 수 있겠지요. 이런 인기 덕분에 페레로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우체국에서 누텔라 출시 50주년을 기념해서 우표를 만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평생을 열심히 일해온 미켈레 페레로는 2015년 숙환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놀랍게도 미켈레가 세상을 떠난 날은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운명처럼 숨졌습니다. 이탈리아 정부는 우리 산업의 발전을 상징하는 위대한 기업가를 잃었다고 발표했고, 국민들은 안타까워했습니다.
페레로의 사회 공헌
2011년에 미켈로의 큰아들이 페레로가의 경영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으로 출장을 갔다가 자전거를 타던 중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숨지게 됩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 지오반니 페레로가 다시 회사를 물려받게 됩니다. 아버지 미켈레 페레로는 다소 보수적인 경영을 했지만 지오반니는 달랐습니다. 세계에 있는 초콜릿과 캔디 기업들을 과감하게 사들입니다. 2018년에는 크런치, 버터핑거 같은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네슬레 캔디사업부를 인수합니다. 2019년에는 켈로그의 제과 부문을 인수하는 등 크고 작은 브랜드를 인수해서 현재 세계 2위의 초콜릿 기업으로 규모를 키웠습니다. 지오반니는 페레로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지속 가능성에 많은 투자를 해왔습니다. 플라스틱 트레이는 모두 종이로 대체하고, 2025년까지 모든 포장을 재사용하거나 퇴비로 만들기로 약속합니다. 또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에서 코코아 농장이 제3 세계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것이 유명합니다. 그래서 페레로는 이러한 부분에도 힘써서 이른 시기부터 지속 가능한 코코아를 조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하고 개선해야 할 부분도 많습니다. 헤이즐넛의 최대 산지인 튀르키예에서 생산하는 헤이즐넛도 대부분이 페레로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9년 튀르키예에서 시리아 난민들이 하루 평균만 원도 받지 못하고 헤이즐넛을 생산한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또 헤이즐넛 농장이나 팜 오일 농장은 많은 탄소를 배출해서 환경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앞으로 공정무역과 환경에 관해서 페레로가 문제를 해결해 나갈지 소비자로서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