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DSLR 카메라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스마트폰에 탑재된 카메라의 성능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좋은 사진을 찍는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필름 카메라를 고수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필름카메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업 코닥의 창업자와 최초의 카메라 출시,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인한 코닥의 파산과 카메라 특허 기술 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지 이스트먼 (George Eastman)
필름 카메라를 처음 개발한 조지 이스트먼은 1854년 미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하지만 갑자기 아버지가 사망한 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집니다. 이스트먼은 어쩔 수 없이 14살 때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낮에는 보험회사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고, 밤에는 회계 공부를 하여 은행원이 됩니다. 24살 때 직장 동료와 함께 중남미의 아름다운 도시 산토도밍고로 휴가를 가기로 합니다. 동료는 멋진 풍경을 담기 위해서 카메라를 가져가자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당시 카메라는 전자레인지만 한 크기였고, 그렇게 큰 카메라를 세우려면 삼각대도 엄청나게 커야 했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습식 플레이트였습니다. 습식 플레이트는 유리판에 에멀전을 바르고 사진을 찍은 다음, 마르기 전에 이것을 들고 암실로 달려가서 현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암실이 가깝지 않은 경우 텐트를 가져가서 미리 암실을 만들어놓고 사진을 바로 현상하기 위한 모든 약품과 장비를 갖춰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가져가려면 짐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스트먼은 휴가를 위해 카메라도 사고, 사진 기술도 배우면서 카메라의 매력에 흠뻑 빠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영국 잡지에서 영국 사진가들은 에멀전을 유리판에 미리 코팅해 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젤라틴 에멀전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부엌에서 실험에 몰두한 기간이 3년. 마침내 1879년 이스트먼은 바로 현상하지 않아도 되는 필름을 개발하는데 이것이 바로 드라이 플레이트였습니다.
최초의 카메라 코닥(Kodak) 출시
이스트먼은 미국에서 에디슨에 비유할 만큼 집념이 대단한 발명가이자 사업가입니다. 드라이 플레이트를 쓰면 사진을 찍고 한참 후에 현상을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이스트먼은 드라이 플레이트 특허를 내고 투자를 받아서 본격적으로 생산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무거운 유리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트먼은 '한 번에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에 빠집니다. 그래서 또다시 오랜 연구를 한 결과, 종이에 사진 유제를 코팅한 다음 감아서 쓰는 방식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바로 롤 필름입니다. 한 번에 사진을 여러 장을 찍을 수 있는 최초의 현대식 필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문 사진사들은 이스트먼의 롤 필름을 사용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유리판보다는 화질이 떨어지고 종이가 뭉쳐서 사진에 흔적이 남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면서 전문가들은 차라리 무거운 유리판을 계속 사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스트먼은 '나 같은 일반인들은 간단하고 효과적인 게 좋으니 나는 내 시장을 만들 거야. 카메라를 연필처럼 쓰기 편하게 만들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대상을 일반인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 결과 탄생한 카메라가 바로 1888년 일반인을 겨냥해서 선보인 코닥 카메라가 출시됩니다.
절대적인 카메라 시장 점유율
이스트먼은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카메라 이름을 고민하다가 어머니 이름의 K를 두 번 넣은 강렬한 이름 코닥(Kodak)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쉽게 눈에 띄고 친숙한 노란색을 사용합니다. 지금까지도 코닥 하면 노란색이 떠오르니 엄청난 컬러 마케팅인 셈입니다. 그리고 코닥 카메라의 첫 번째 가격은 100장짜리 필름을 포함해서 25달러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진 현상소가 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필름 100장을 다 찍고 카메라와 10달러를 넣어서 이스트먼의 회사에 보내면 현상된 사진과 함께 100장짜리 필름을 새로 끼워서 돌려줬습니다. 그리고 이때는 남자만 사진을 찍던 시장이었는데, 여성인 '코닥 걸' 캐릭터를 광고에 등장시켜서 사진이 전문가나 남성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이스트먼은 더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게 하기 위해서 또 아이디어를 냅니다. 대부분의 면도기는 저렴하게 판매하고 계속 바꿔야 하는 면도날은 비싸게 판매하는 면도기 시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이처럼 카메라는 싸게 팔고 필름을 계속 팔기 위해 1900년 1달러짜리 카메라 브라우니를 선보입니다. 이 안에 들어가는 필름은 15센트였는데, 이후 40년 동안 브라우니 카메라는 2500만대가 팔렸습니다. 당연히 그 안에서 들어가는 필름도 꾸준히 판매되었습니다. 또 1935년에는 첫 번째 컬러 필름 코닥크롬을 선보였고, 1969년 인류가 달에 착륙한 장면을 찍은 것도 코닥 카메라였습니다. 1970~1980년대 코닥은 미국에서 필름은 90%, 카메라는 85%로 절대적인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소중한 시간 순간을 '코닥 모멘트(Kodak moment)'라고 부를 만큼 코닥은 일상 속의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조지 이스트먼은 카메라도 만들고, 영화용 필름 사업에도 뛰어들어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을 생산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70대에 접어들면서 요추협착증으로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중 이스트먼은 1932년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나는 이제 모든 할 일을 다 했다. 무엇을 더 기다리겠는가?'라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이스트먼은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했지만, 사업으로 번 돈을 모두 사회에 기여합니다. 피아노 연주를 즐기고, 음악의 조예가 깊었던 이스트먼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이스트먼 음악대학과 의과대학도 세우고, 저소득층을 위한 병원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산 대부분이 여러 대학교에 기부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회사 직원들이 풍요롭게 일할 수 있는 노동 환경도 만들었습니다. 당시의 모든 직원을 종신 고용했고, 직원들에게도 주식을 나눠주고 큰 배당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트먼 사망 후에도 코닥은 오랫동안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스트먼이 1932년에 사망했지만 1990년대까지도 코닥 일회용 카메라가 1년에 1억대씩 팔릴 정도였습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파산 보호 신청
이후 카메라 시장에는 꾸준히 경쟁자가 등장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칼자이스, 라이카, 일본에서는 캐논, 니콘, 펜탁스 경쟁 기업이 등장했습니다. 또 필름 분야도 일본의 후지, 독일의 아그파 같은 경쟁사들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코닥의 아성을 빼앗지는 못 했습니다. 그런데 코닥을 위협하는 경쟁자는 완전히 생각지 못한 분야에서 등장합니다. 코닥을 위기로 내몬 막강한 라이벌은 바로 디지털 카메라였습니다. 1981년 일본의 소니(Sony)는 필름 이미지 센서로 영상을 기록하는 디지털카메라 '마비카'를 출시하면서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열었습니다. 물론 이때만해도 21세기에 디지털 카메라가가 아닌 휴대폰 카메라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디카가 등장한 것만으로도 코닥의 주가가 순식간에 10분의1이 되어버립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사실은 소니보다 먼저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한 회사가 바로 코닥이었다는 것입니다. 1975년에 코닥의 연구원이었던 스티브 사손이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코닥 임직원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개발 초기였던 당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은 아날로그 사진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카메라 크기도 컸고 해상도는 10만 화도로 매우 낮았습니다. 또 사진을 찍을 때 무려 23초가 걸렸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23초 동안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경영진이 반대한 이유는 필름이 필요 없는 카메라는 필름으로 돈을 버는 회사의 존재를 부정하는 기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81년 SONY가 처음으로 디지털카메라를 발표했을 때도 코닥의 내부에서는 디지털카메라가 위협을 가져올 거라고 이미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카메라 필름으로 돈을 잘 벌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판단하고 필름 사업에 계속 집중했습니다. 주력인 필름 시장이 잠식당할까 봐 주저하다가 다른 기업이 모두 디지털카메라를 내놓은 1994년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디지털카메라를 출시했고, 결국 일찍부터 출시한 캐논과 니콘에 밀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내리막길을 걷던 2012년 결국 코닥은 파산 보호 신청을 결정합니다.
코닥의 카메라 특허 기술
하지만 코닥에는 수많은 카메라 특허가 있었습니다. 이스트먼이 사업 초반부터 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자들을 대거 뽑으면서 연구개발에 크게 투자를 했습니다. 이때 연구소장에게 이스트먼이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첫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연구해라'. 둘째는 '당신의 임무는 사진술의 미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기술을 개발한 결과 1990년대까지 코닥의 특허는 15,000개가 넘었고, 그중에서도 카메라와 관련된 1,100개의 특허는 코닥 시가총액의 5배가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중에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폰 카메라를 개발하는 기업들이 이 특허를 피해서 개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코닥이 2008년에서 2010년까지 3년 동안 특허로 벌어들인 수익만 우리 돈 25조 원이 넘습니다. 그래서 파산 신청 후에 코닥은 핵심 자산 중 하나인 디지털 이미징 특허권을 삼성전자, 애플, 구글 등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에 5억 2500만 달러에 매각했습니다. 미리 특허를 등록해 둔 것이 나중에 위기에 처한 회사를 살리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파산하기 한참 전인 1994년 코닥은 화학 분야를 이스트먼 화학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분사시켰습니다. 이스트먼 화학은 첨단 소재 회사로 제품 포장재부터 타이어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상에 필요한 제품의 원자재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스트먼 화학은 포춘 500(Fortune 500) 기업에 포함될 정도로 승승장구하면서 아직까지 조지 이스트먼의 명예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닥 역시 인원을 감축하고 특허를 매각하는 등의 노력으로 2013년 1년 만에 파산 신청을 졸업하고 뉴욕 증권 거래소에 재상장합니다. 인쇄와 필름 등 기업을 위한 이미지는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듯 좋은 브랜드도 이름이 오래오래 남습니다. 코닥의 브랜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항상 브랜드 인기 순위 5위 안에 될 만큼 강력했습니다. 그래서 코닥은 현재 이름을 빌려주는 라이센스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휴대폰 케이스, TV 심지어 블록체인 코인까지 나왔는데, 모두 코닥의 명성을 빌려 주목받았습니다. 그리고 2020년 한국의 '하이라이트 브랜즈'라는 회사가 코닥의 라이센스를 사와서 의류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코닥이 주는 레트로한 색감을 잘 살려서 의류 브랜드로 만든 것인데 그만큼 코닥이라는 브랜드가 136년 동안 쌓아온 브랜드 유산이 강력하다는 의미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코닥의 기술과 자원은 흩어졌지만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던 창업자의 정신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