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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창작과 비평, 발간인 백낙청 선생, 문학상

by 아이스 야쿠르트 2024. 10. 26.

지난 10월 10일 한강 작가님이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수상 후 한강 작가님의 책이 2주 만에 100만 부 이상 팔리면서 대한민국의 독서 열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요즘 한강 작가님의 책을 출판한 출판사들도 아주 바쁜데요. 그중에서 반백 년 역사가 넘은 출판사 '창비'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출판사 창비

 

창작과 비평 발간인 백낙청

요즘 한강 작가의 특수효과 제대로 누리고 있는 창비의 발간인은 바로 백낙청 선생입니다. 1938년생인 백낙청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UN이 주관하는 세계 고교 토론대회에 한국 대표로 나갈 정도로 어학과 문학에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1950년 하버드대학교 영문학과에 진학합니다.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한국으로 돌아와 무려 25살에 서울대 영문과 교수가 됩니다. 그는 당시 한국에 들어오면서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파르티잔 리뷰 같은 잡지를 한국에 창간해서 한국 문단에 기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966 문우 출판사의 사무실 일부와 출판사 이름을 빌리고 지인들을 모아서 잡지를 출간하는데요. 이 잡지가 바로 창작과 비평입니다. 이후 오랫동안 독자들도 창작과 비평을 줄여서 창비라고 불러왔는데, 2003년부터는 출판사 이름을 창비로 바꿨습니다. 그전에도 한국에는 출판사도 있고, 문학잡지도 있었지만, 창작과 비평은 기존 출판사들과 조금 달랐습니다. 시와 소설 같은 문학도 실렸지만, 비평문이라든지, 정치 같은 비문학 글도 실었습니다. 그 당시 잡지는 보통 세로 쓰기를 많이 했는데, 창비는 가로 쓰기를 하고 한자의 사용도 대폭 줄였습니다. 또 해외 유명 지식인의 글을 번역해서 실었습니다. 또 대부분의 잡지는 월간지였는데 창작과 비평은 계절마다 발간하는 계간지였습니다. 매달 잡지를 발행하기에는 재정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더 품질은 좋았고, 기성 문학이 폐쇄적이고 권위적이었기 때문에 젊은 문인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창비는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틀을 깼습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해야 된다.' '순수문학에도 사회에 대한 저항 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작품들을 실으면서 창작과 비평만의 색깔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잡지가 수익이 나려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했습니다. 이때는 독자들이 잡지에 실린 연재 소설을 보는 게 큰 낙이었습니다. 잡지에 실린 대표적인 작품이 1967년부터 창비에 3회에 걸쳐서 연재된 방영웅 작가의 '분례기'입니다. '분례기'는 뒷간, 즉 화장실에서 낳았다고 해서 '똥례'라고 불리는 여인의 삶을 통해서 농민들의 삶을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 독자들이 다음 계절을 기다릴 만큼 인기가 치솟았고 창작과 비평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됩니다. 1970년에는 문학과 지성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창작과 비평은 사회 참여적인 목소리를 높였다면, 문학과 지성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면서 오랫동안 두 잡지가 우리나라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습니다.

 

긴급조치 9호 발령

1973년부터 창작과 비평사는 잡지뿐만 아니라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를 등록하게 됩니다. 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다루는 창비 신서, 시집을 내는 창비 시선, 어린이들을 위한 창비 아동 문구까지 분야를 확대합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암울해집니다. 당시 정권이 지식인들의 입을 막고 언론과 출판을 억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1974년 문인들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합니다. 백낙청을 비롯한 창작과 비평사의 임직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그 결과 백낙청은 서울대 교수에서 파면됐고, 당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편집하던 임직원들도 해직됩니다. 대신 이분들이 열심히 잡지와 책을 출간하면서 품질은 더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1975년부터 출판과 언론은 더 엄혹한 환경을 맞게 됩니다. 이 배경이 된 사건은 바로 '긴급조치 9호 발령'입니다. 유신 헌법에 대해 비방이나 부정하는 모든 방송이나 표현물은 영장 없이 체포의 대상이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인기를 끌던 창작과 비평의 잡지가 주요 검열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다가 도피 중이던 김지하 시인의 '시 타는 목마름'을 창비에 실었다가 판매 금지가 되었습니다. 또 다음 계절에는 리영희의 베트남 전쟁 논문을 실었다가 판매 금지가 됩니다. 잡지뿐만 아니라 신동엽 전집을 포함한 많은 책이 판매 금지가 되었습니다. 1977년에는 리영희 작가가 번역한 8억 인과의 대화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서 리영희는 징역 2년 형을, 발행인인 백낙청은 집행유예를 받기도 했습니다. 재판장에서 흰 수의를 입은 리영희와 양복을 입은 백낙청의 발언이 굉장히 논리적이라 마치 톨스토이의 소설 한 장면 같다고 할 정도로 압도적인 장면 연출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 앰네스티는 두 사람을 양심수로 선정했습니다. 게다가 창작과 비평을 만들던 임직원들과 편집자들은 눈을 가린 채 안기부로 끌려가서 조사도 받고, 고문도 받고, 가택 수색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 우회적으로 표현을 하기도 하고, 소설 가운데를 빈칸으로 놔두기도 하면서 문학과 글을 통해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때 판매 금지된 책이 매우 많았습니다. 판매금지 서적이 암암리에 유통되면서 사실 더 많은 인기를 끌게 됩니다. 못 보게 하니까 더 보고 싶은 심리였습니다. 그래서 대학가에는 리어카에 창비의 책을 잔뜩 싣고 와서 영업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대학생이라면 자고로 창비를 읽어야 한다.'라면서 잡지 구독을 유도했고, 많은 학생이 창비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대학가 서점에도 판매금지 서적을 암암리에 유통시킵니다. 김지하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는 판매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경로에서 한 달에 1만~2만 부가 꾸준히 판매되었을 정도였습니다. 신동엽의 전집, 리영희의 '전환 시대의 논리', 현기영의 '순이 삼촌' 등 수많은 판금 서적이 날개 돋친 듯 팔리면서 판매금지 서적 목록이 곧 베스트셀러 목록이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습니다.

 

무크 발행과 출판사 등록 취소

유신 정권 이후에 출연한 신군부는 출판물 통제를 더욱 강화합니다. 급기야 1980년 창작과 비평을 포함한 정기간행물 172종을 강제 폐간시킵니다. 그렇게 잡지 발행은 강제 중단됐지만, 창작과 비평사는 출판물을 꾸준히 냅니다. 그런데 5년 뒤 창비는 다른 모험을 합니다. 단행본과 잡지의 특성을 합친 출판물을 무크(mook)라고 하는데, 창작가 비평은 그 이름을 그대로 써서 무크로 책을 발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게 큰 문제가 됩니다. 한 달 뒤 서울시가 정기간행물 등록을 하지 않고 불법으로 속간했다면서 창작과 비평의 출판사 등록을 취소한 겁니다. 출판사 문을 강제로 닫게 되자 문인들과 시민들은 참지 않았습니다. 전국 31개 문학동인지에서 성명 발표를 하고, 보름 만에 11개 출판사 대표를 포함해서 각계 인사, 지식인, 시민 2853명이 서명을 합니다. 창작과 비평사의 직원들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 출근했습니다. 창작가 비평사는 비평을 빼고 창작사라는 출판사를 새로 등록하고 책을 계속 출간했습니다. 그러자 서점과 독자들은 이 시련을 겪고 있는 창비를 살리자면서 창비 책 팔아주기 운동까지 불사했습니다. 다행히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을 때 문화공보부에서 창작과 비평을 복간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게 됩니다. 대신 백낙청을 비롯한 운영진은 출판사에서 손을 떼고, TV에 출연해서 앞으로는 우량도서만 출판하겠다고 선언하라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운영진은 이를 수락합니다. 창작과 비평이 정부와 타협을 했다며 실망한 독자들도 있었지만, 우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 결과 1983년에는 창작과 비평사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고, 1988년 봄에는 창작과 비평이 복간되었습니다.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끈질긴 민주화운동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작과 비평은 오늘날까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출간되며 쭉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창비의 문학상

다행히 90년대에 접어들면 민주화된 세상에서 자유롭게 책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출판의 성향도 교양서, 대중서로 확대합니다. 1990년대에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사랑받았습니다. 또 350만 부가 판매된 '소설 동의보감', 홍세화 작가의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 등을 출판했습니다. 또 최영미, 공지영 신경숙 등 수많은 작가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냅니다. 끊임없이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작가들이 전업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역할을 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문학상입니다. 요즘은 매체가 발달하면서 작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지만, 과거에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문학상을 받아서 인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창비에서도 오래전부터 다수의 문학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먼저 만해 한용운 선생을 기리는 만해문학상으로 시작했습니다. 1974년 신경림 작가의 '농무'가 첫 수상을 했고, 2014년에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가 수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동엽 문학상과 백석 문학상도 있습니다. 그동안 문학상은 창비에 투고된 원고 중에서 선발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는 공모전 형식으로 문학상을 더 다양화합니다. 시민 문학상, 장편 소설상, 청소년 문학상을 통해서 새로운 문학작품을 꾸준히 발굴하고 있습니다. 창작과 비평처럼 글을 연재를 할 곳, 문학상을 받을 곳이 있다는 것은 작가들에게는 정기적으로 수익이 생기고, 독자들과 반응을 보고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일입니다. 참고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도 출간하기 전에 창비의 공식 블로그에서 사전 연재를 했고 독자들과 반응을 본 후에 완결이 된 후 2014년에 출간했습니다.

 

창작과 비평은 2003년에 파주 출판도시로 이전을 하면서 사옥을 짓고 이름도 창비로 바꿉니다. 신경숙 표절사태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지난 2016년부터는 창간 50주년을 맞아 편집진을 새로 구성하고 개편했습니다. 이후에도 전통을 이어가면서 젊은층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겠다면서 소통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부디 창비가 창업 초기의 힙함과 날카로움을 잘 살려서 오래도록 좋은 책을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