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착한 빵집 성심당의 선행, 튀김소보로의 탄생

by 아이스 야쿠르트 2024. 9. 20.

얼마 전 류현진 선수가 LA 다저스 감독에게 성심당 빵을 선물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PPL도 아니었는데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지난해 SNS에서는 성심당이 허위광고를 했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성심당이 판매하는 딸기 시루 케이크가 2.3kg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실제로 무게를 재보니 2.3kg보다 더 중량이 무겁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소비자가 성심당이 과소광고를 하고 있다며 SNS에 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런 허위 광고는 환영이라며 돈쭐을 내주겠다고 달려갔습니다. 노잼 도시 대전을 초특급 꿀잼 도시로 만든 빵집이 바로 성심당입니다. 성심당의 창업과 튀김소보로의 탄생 과정, 기업의 선행 등을 소개합니다.

 

성심당

 

 

1. 성심당의 창업

함경남도 함흥의 시골 마을에서 과수원을 하던 임길순은 1950년 한국전쟁 중 흥남부두 철수작전의 마지막 배에 겨우 탑승하여 경남 진해에 정착합니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냉면 장사를 시작한 지 6년이 되던 해 경부선 철도가 개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길순은 고향과 가까우면서도 대도시인 서울에 자리 잡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기차를 탑니다. 그런데 5시간을 달리던 기차 갑자기 고장으로 대전에서 멈춰 섭니다. 이때만 해도 기차가 막 개통했고 시설도 엄청 낙후돼 있어서 한번 멈추면 며칠 동안 언제 다시 떠날지 기약이 없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길순은 하는 수 없이 대전에 내립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길순은 역에서 가까운 성당에 찾아갔습니다. 신부님은 길순의 사연을 듣더니, 미국에서 지원받은 밀가루 중 2포대를 건네줍니다. 길순은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서 장사를 시작합니다. 천막에 나무 간판도 내겁니다. 이때 간판에 쓰인 빵집 이름이 바로 예수의 마음을 뜻하는 성심당이었습니다. 임길순이 성심당이란 이름을 붙인 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길순은 하루에 찐빵 300개를 만들고 100개는 남겨서 역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마침 이때는 정부가 혼분식 장려 정책을 펼 때였습니다. 쌀이 부족하니까 정부가 밀가루 소비를 적극 장려했고 미국의 밀가루 무상 원조도 많이 들어왔을 때입니다. 그 결과 성심당 빵집은 점차 자리를 잡았고, 2년 만에 작은 가게에 월세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2. 튀김소보로의 탄생

성심당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창업주 임길순이 빵을 못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장장과 제빵사들을 고용해서 빵집을 운영을 했습니다. 그러다 제빵사들이 하루 아침에 잠적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주인에게 빵기술이 없는 걸 아는 제빵사들이 툭하면 가불을 하고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끌려 다닐 수만은 없었던 임길순은 어느 날 "더 이상 가불은 없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공장장은 제빵사 4명을 데리고 성심당을 떠나버립니다. 성심당은 하루아침에 제빵사가 없는 빵집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대학에서 섬유공학을 전공했고, 가업을 이어 갈 생각이 없었던 큰 아이들 임영진은 이 사건을 지켜보고 본인이 제빵 기술을 습득하기로 결심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빵 만드는 걸 봐왔던 20대 초반의 영진은 제빵 기술을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얼마 뒤 새 공장장으로 오용식이 들어옵니다. 오 공장장은 아이디어가 많고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는데 영진과 아주 죽이 잘 맞았습니다. 매일 새로운 재료와 레시피를 의논하던 두 사람은 1980년 튀김소보로를 선보입니다. 단팥빵의 달콤함에 소보로의 고소함, 게다가 도넛의 바삭함을 하나의 빵 안에 담은 것입니다. 항간에는 사람들이 소보로를 실수로 튀김기에 빠뜨려서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는데 사실은 두 사람이 아이디어를 낸 이래로 수없이 실험을 반복하면서 제품을 개발해 낸 것입니다. 게다가 영진은 튀김소보로를 만드는 생산 라인을 손님이 볼 수 있도록 매장 안에 설치합니다. 당시만 해도 빵 공장은 대부분 어둡고 칙칙한 곳, 사람들이 안 보이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불량식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영진은 눈앞에서 빵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자글자글 기름 끓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골목으로 퍼져나갔고 이 빵집을 찾은 손님들도 소보로 빵을 튀기는 모습을 신기하게 계속 쳐다보았습니다. 이렇게 튀김소보로는 시각과 청각 후각까지 즐길 수 있는 메뉴였습니다. 그 결과 골목에 줄이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영진은 은행 창구에서 봤던 번호표를 등장시키고 구매 수량도 3개까지 제한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튀김소보로는 성심당의 명물이자 대전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3. 성심당의 위기 극복

튀김소보로를 만든 임영진은 28살 때 성심당 경영을 공식적으로 인계받습니다. 그는 1982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을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혼여행을 빌미로 일본에 가서 궁금했던 일본 빵 시장을 보게 됩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눈썰미가 좋았던 그의 아내는 일본의 빵집 인테리어를 유심히 관찰합니다. 그리고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성심당 빵집의 조명을 모두 교체합니다. 백열등 대신 할로겐 조명을 써서 빵이 마치 미술관 작품이 된 것 처럼 보였습니다. 1980년대 황금기를 보내면서 지역 명물로 성장한 성심당. 하지만 1990년대는 성심당에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성심당이 있던 원도심의 핵심 관청들이 둔산으로 이동하면서 원도심은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빵집의 트렌드도 바뀌었습니다. 그전까진 소보로 단팥빵 같은 일본식 빵들이 유행했는데 90년대부터는 바게트 크루아상 치아바타 같은 정통 유럽 빵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유럽식 빵 수요가 늘어나자 졸지에 튀김소보로 같은 빵들은 기름에 튀겨낸 안 좋은 식품이라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대기업 프랜차이즈들이 등장하면서 동네 빵집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형을 도와 함께 성심당을 운영해 나가던 동생이 독립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성심당 이름으로 당시 유행하던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96년 두 개의 성심당이 탄생하게 됩니다. 형은 개인 사업자로 성심당 본점만 계속 운영을 해 나갔지만 동생은 법인을 차리고 프랜차이즈를 24개까지 늘려나갑니다. 전국은 물론이고 해외 진출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확장을 하다 보니 품질을 일관되게 유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고객들은 영진이 운영하는 성심당 본점에 찾아와서 성심당 맛이 변했다면서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1996년 시작한 동생의 성심당 프랜차이즈 사업은 외환위기를 맞고 계속 쇠락을 한 결과 2003년 최종 부도처리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형의 성심당도 부채를 떠안고 인지도 측면에서도 타격이 컸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또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2005년 밤사이 일어난 화재로 3층 공장이 전소되어 빵을 만들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너무 암담했던 영진 부부는 빵 사업을 접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빵집에 가보니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심당 직원들이 잿더미 속에서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청소와 함께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감명받은 영진 부부는 어렵게 중고 기계를 1대 구해서 가게 한쪽에 임시로 공간을 세워서 빵 반죽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직원들이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불이 나고 6일 만에 가게를 다시 오픈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문을 열자 대전 시민들이 밀려 들어와 따뜻하게 손을 잡고 위로를 해 주며 빵을 사갔습니다.

 

4. 성심당의 선행

성심당은 사실 창업주 임길순부터 직원들을 매우 아꼈습니다. 어린 제빵사들 중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직원들을 학비를 대주면서 야간학교에 다니게 했습니다. 또 대전역에 처음 노점을 연 이래로 성심당은 매일 남은 빵을 지역 사회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누는 빵의 양이 매달 3천만 원어치라고 합니다. 임영진도 부모님의 뜻대로 돈을 벌기 위해 좋은 일을 한 게 아니라 나누고 살기 위해서 사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이 마음을 지역 직원들과 지역 주민들이 알았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을 함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014년에는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성심당이 교황의 빵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성심당에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교황은 식사 때마다 모든 빵을 맛있게 드셨고, 특히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 케이크를 남김없이 드셨습니다. 또 바티칸 직원들을 위한 초콜릿을 따로 주문하고 초콜릿 값도 내고 가셨다고 합니다. 교황이 먹은 빵이라고 성심당은 소문이 나며 전국에서 빵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차례로 좋은 일이 일어나면서 감사한 마음을 가진 임영진 부부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하기로 결심합니다. 매년 회사의 영업이익의 15%를 직원들에게 인센티브로 나누었고,  빵은 물론 외국어 교육에 이르기까지 직원들의 자기 계발비를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빵을 기부하는 것 외에도 영업이익의 상당 부분을 기부했습니다.

 

성심당은 자신들이 대전에서 받은 사랑을 대전에서 돌려주고자 팝업스토어 외에는 다른 지역에 진출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대전에 10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성심당은 가맹점과 직영점이 4천 개에 달하는 파리바게뜨보다 높은 영업 이익을 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제 창업 70주년을 맞는 성심당이 100년 넘게 오래도록 지역사회의 따뜻한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