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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기업 갓뚜기 오뚜기 함태호 회장의 사회공헌

by 아이스 야쿠르트 2024. 9. 18.

선행으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는 기업 오뚜기. 창업주 함태호 회장이 국내에 첫 선을 보인 카레와 케찹, 마요네즈, 레토르트 식품, 라면시장 도전, 사회공헌 활동 등을 소개합니다. 

 

오뚜기

 

1. 함태호 회장의 독립

오뚜기 함태호 창업주는  193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 함형준은 6.25 이전에 월남하여 부산에서 건어물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이 잘 되자 가족을 모두 서울로 불러 내립니다. 소년이었던 함태호는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며 유복한 학창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고, 고등학생이던 태호는 피난 대신 학도병으로 자원입대를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위험한 결정에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태호는 '전쟁이 났는데 아무것도 안 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육군 종합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육군 소위로 임관합니다. 이후에는 7년 동안 최전선에 배치되어 전투를 지휘했고, 전역 후에는 뒤늦게 홍익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합니다. 이때 그의 아버지는 조흥화학이라는 회사를 공동창업하여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함태호는 아버지의 회사에 입사하여 10년간 근무하며 자신의 사업을 꿈꿨습니다. 이때가 삼양과 농심이 국내에서 라면 사업을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라면 말고 또 다른 식품을 찾던 그는 카레를 국내에 선보이기로 결정합니다. 카레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들여왔지만 부자들만 접할 수 있는 음식이었고, 모두 일본에서 수입된 제품뿐이었습니다. 함태호는 밥과 국을 찾는 한국사람들이 국 대용으로 먹을 수 있도록 우리 입맛에 맞게 카레를 개량합니다. 당시는 냉장고가 보급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분말 형태의 카레를 만들었고, 40세에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풍림상사라는 회사를 창업합니다. 

 

2. 오뚜기 카레 출시

1969년 첫 선을 보인 오뚜기 카레는 당시 평균 가구수가 5인이었기 때문에 5인분 제품으로 출시합니다. 또한 가족단위 소비층을 겨냥해 5월 5일 어린이날 출시를 합니다. 회사명인 풍림산업과 제품명인 오뚜기 카레 모두 인지도가 낮아 찾는 사람이 없자 함태호 창업주와 영업사원들은 버스를 타고 백방으로 뛰기 시작합니다. 보통은 제조업자들이 중간 도매상에게 제품을 납품하고, 도매상이 전국의 가게에 파는 시스템인데, 풍림상사는 영업사원이 직접 가게를 방문하여 제품을 납품했습니다. 바로 국내 최초의 루트세일을 시도한 것입니다. 루트 세일이란 마트를 찾아다니며 사장님들에게 직접 인사하고, 제품 진열도 하고, 가게 일을 도와주며 궂은일도 도와주며 제품을 알리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출출할 시간에 맞춰서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놀다 집에 들어와 "일요일은 오뚜기 카레"를 외치는 TV 광고를 시작했고, 광고 효과로 1년 만에 시장을 석권하고, 회사명도 오뚜기로 바꾸게 됩니다.

 

3. 국내 최초 레토르트 제품 출시

함태호 창업주는 부자들만 알음알음 수입해서 먹고 있던 토마토케찹과 마요네즈에 주목합니다. 당시 한국산 토마토 케찹이 있기는 했지만 토마토 함량이 0%로 밀가루 풀을 만들어서 식초와 간장으로 맛을 내고 빨간색 색소를 불량식품이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외국 기술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설비투자를 하여, 제대로 된 케찹과 마요네즈를 선보였습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인즈 케찹과 베스트 푸드의 마요네즈가 한국에 수입되기는 하지만 오뚜기가 압도적으로 국내 1위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기존의 카레에도 혁신이 일어납니다. 국내 최초의 레토르트 제품 '오뚜기 3분 요리' 시리즈를 출시합니다. 레토르트 제품이란 완전 조리된 음식을 특수 포장지에 담아 살균처리한 제품을 말합니다. 무균으로 만들기 때문에 방부제를 넣지 않아도 되고, 데우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어서 맛과 영양이 유지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국내 최초로 레토르트 제품을 선보인 오뚜기는 3분 카레를 시작으로 짜장, 미트볼, 제육덮밥, 낙지덮밥 등을 출시하며 국내 레토르트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4. 오뚜기의 라면시장 도전

카레로 사업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즉석식품 하면 라면을 빼놓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함태호 사장은 1987년 라면을 만드는 청보식품을 인수합니다. 그러나 당시 라면시장은 농심, 삼양식품, 팔도, 빙그레 등의 회사들이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뚜기는 천천히 투자하며 새로운 라면을 개발하고, 맛을 끊임없이 리뉴얼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품이 진라면, 스낵면, 열라면, 참깨라면 등 수많은 라면을 출시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라면 업계에서 하위권을 유지했지만 2012년부터는 반격이 일어납니다. 진라면 순한맛과 스낵면이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사람들이 즐겨 찾기 시작했고 참깨라면과 열라면도 재조명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오뚜기는 라면 업계 2위까지 올라서게 됩니다. 오뚜기의 라면사업 진출은 신의 한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카레나 케찹 시장은 크게 성장하지 않은 반면, 라면 시장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처음에 4천억원 규모였던 라면 시장이 현재는 2조원이 넘고, 해외에서 K라면 열풍이 불어 오뚜기의 수출 중 70%는 라면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5. 함태호 회장의 사회공헌

처음 함태호 회장의 미담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6년 노환으로 별세한 그의 장례식에 유난히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오면서였습니다. 함태호 회장은 1992년부터는 한국 심장재단을 통해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 5천여명의 수술비를 지원했고, 1996년부터 천 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65억이 넘는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그 덕분에 잘 자란 학생들이 함 회장의 장례식에 찾아오면서 그의 선행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그의 선행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함태호 회장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남다른 철학 때문이었습니다. 함태호 회장은 생전에 조용한 윤리 경영을 강조하며 옳고 정의로운 일을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해왔습니다. 함태호 회장은 어린이 환우, 장학생뿐만 아니라 장애인에게도 지원을 이어갔습니다. 2012년부터 오뚜기는 장애인이 직원으로 일하는 밀알복지재단의 굿윌 스토어에 선물세트 조립과 가공을 위탁해 왔습니다. 2015년에는 함태호 회장 개인의 주식 3만주, 당시 가치로 315억원 이상을 밀알복지재단에 기증했습니다. 또, 오뚜기 학술상을 만들어 매년 두 차례 식품산업 발전에 기여한 학자들에게 시상하는 등 다양한 후원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역도 금메달리스트 장미란 선수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있을 때 음식을 잔뜩 싣고 찾아와 현금과 현물 지원을 약속하면서 '절대 계약 사실을 알리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훗날 장미란 선수는 함태호 회장이 자신에게 키다리 아저씨였다고 전했습니다. 또한 함태호 회장은 사람을 비정규직으로 쓰지 말라는 철학을 남겨 오뚜기는 마트 시식코너의 직원까지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있습니다. 

 

갓뚜기라는 애칭이 붙기 전인 2014년 오뚜기의 라면시장 점유율은 19%였는데 2018년에는 28%까지 치솟았습니다. 착한기업의 이미지가 실제 기업의 수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최근 식품업계는 여러가지 이유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우직하게 정도 경영을 한다면 소비자로서 끝까지 오뚜기를 응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