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야외에서 자전거를 타기 딱 좋은 계절입니다. 라이딩의 계절 가을을 맞아서 각종 자전거 대회가 열리고 있고, 또 자전거 업체들도 활발한 판촉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70여 년 전에 국내 최초의 자전거를 만들어서 여전히 국내 1위를 이어오고 있는 기업 삼천리 자전거의 창업과 기술 개발로 맞이한 자전거 전성시대를 소개합니다.
삼화 제작소로 시작
삼천리 자전거를 창업한 사람은 김철호 창업주입니다. 1905년 경북 칠곡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김철호는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까지 해서 더욱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그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납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제조업의 노동자가 많이 필요했고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을 했습니다. 김철호는 삼화 제작소라는 철공소에 취직합니다. 볼트와 너트를 만드는 철공소였는데 얼마나 성실히 일했는지 조선인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4년 만에 회사의 지배인이 됩니다. 하지만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졌고 일본의 경제 상황도 급격히 안 좋아집니다. 그래서 삼화 제작소도 문을 닫게 되면서 직원들에게 퇴직금 대신 기계를 지급할 정도로 굉장히 어려워졌습니다. 이때 다른 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김철호는 포기하지 않고 기계를 받아서 작은 창고를 하나 빌려서 삼화 제작소 간판을 그대로 답니다. 25살의 조선인 청년 김철호가 삼화 제작소 사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머지않아서 중일전쟁과 만주사변이 연이어 터졌고 군수용 볼트와 너트 주문이 밀려듭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공장을 3개까지 늘리고, 직원이 300명이 넘을 정도로 사업이 커지면서 김철호는 큰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국내 최초의 자전거 출시
그러나 1943년 일본의 패망이 예상되자 김철호는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영등포에 경성 정공 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일본에서 쓰던 기계와 장비를 가져와서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기계 설비를 또 뜯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갑니다. 이렇게 피난을 떠난 부산에서 회사를 다시 세워 이름을 기아 산업으로 정합니다. 지금은 현대자동차로 인수된 기아 자동차의 전신입니다. 김철호 회장이 자전거를 만들다가 자동차까지 개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삼천리 자전거와 기아자동차는 형제기업입니다. 회사 이름을 기아 산업으로 바꾼 후 본격적으로 국산 자전거 개발에 착수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도 자전거 부품은 만들어 봤지만, 완제품을 만들려고 하니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전거 기술의 꽃이라 불리는 부품 바로 림 기술이 없었던 것입니다. 림은 자전거 바퀴 바깥쪽에 고무 타이어가 감싸고 있는 동그란 철로 된 테를 말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공업 수준이 낙후되어 림을 제작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설계할 도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철우는 일본인 자전거 기술자를 한국으로 데려옵니다. 이렇게 해서 1952년 국내 최초의 자전거가 출시됩니다. 삼천리는 남한의 땅끝인 전라남도 해남에서 북한의 땅끝인 함경북도 나진까지의 거리가 3 천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반도 모두를 우리 자전거로 덮겠다'라는 뜻으로 삼천리 자전거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때는 전쟁으로 모든 것이 침체되어 있었던 우리나라에도 우리 기술로 만든 자전거가 생겼다는 자부심에 국민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격려차 직접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기아 산업 자동차 생산
자전거에 들어가는 부속과 완제품을 모두 만들게 되니 여기에 동력장치인 엔진만 달면 자연스럽게 자동차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1962년 기아 산업은 일본 혼다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국내 최초의 오토바이 생산에 성공합니다. 또 일본의 동양 공업과 제휴로 최초의 삼륜차 K360을 출시합니다. 이렇게 기아 산업이 3년 만에 성공하면서 국내 최초로 종합 자동차 공장을 완공합니다. 순조롭게 기술이 발전하다가 1980년대에는 소형차 시장을 휩쓸었던 국민차 프라이드를 출시하면서 자동차 보급 속도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보다 자전거 사업 부문이 더 빠르게 커졌습니다. 국민들에게 자전거가 많이 보급이 되자 김철호는 1979년 자전거 사업부를 분산시켜서 삼천리 자공을 설립합니다. 이것이 현재의 삼천리자전거 주식회사가 되었습니다. 이때 기아그룹은 한국 최초로 오너가 경영에서 손을 떼고 전문경영인을 도입합니다. 일찍이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기는 했지만, 이것 때문에 기아 그룹은 이후 경영권 공격에 취약했습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을 계속하고 싶었던 삼성이 기아를 호시탐탐 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IMF로 기아 그룹이 부도에 몰렸을 때 정작 삼성은 당시 인수할 여력이 없었고 결국 1998년 국제입찰을 통해서 현대자동차에 매각됩니다. 김철호 창업주는 그 전인 1973년에 지병을 얻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김철호 회장은 자전거 사업으로 시작했다 보니 자전거 사업이 애정이 각별했습니다. 김철호 창업주는 생전에 기아자동차가 힘들어져도 삼천리 자전거는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래서 삼천리 자전거도 1985년 기아그룹으로부터 완전히 분리 독립하면서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기아 자동차와 삼천리 자전거가 그렇게 분리가 됐습니다.
자전거 전성시대
1970~1980년대는 자전거 전성시대였습니다. 70년대 삼천리 자전거는 국내 시장 점유율 65%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독과점 품목으로 지정해서 가격을 통제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1987년에는 연간 생산량이 100만 대를 돌파했고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60만대의 자전거를 미국과 아프리카로 수출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전거는 운송이나 배송 목적이 아니라 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됩니다. 학생들이 통학용으로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전거는 항상 학생들이 받고 싶은 선물 1위에 꼽히기도 했습니다. 삼천리 자전거도 국민들의 변화에 맞춰서 새로운 브랜드를 선보입니다. 레저와 스포츠를 결합한 레스포는 3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출시되고 있는데, 국민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자전거로 계속 출시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도 콜라보도 많이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티니핑과 손을 잡고 어린이용 자전거 3종을 출시해서 어린이날 출시했는데 바로 완판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앙드레 김 선생님과 협업도 했습니다. 2007년에 삼천리 자전거가 논현동으로 본사를 이전했을 때 맞은편에 앙드레 김 선생님의 아뜰리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직원이 앙드레김 선생님이 자전거를 디자인해 주면 어떻게 나올까 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선생님이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2009년 국내 최초로 패션 디자이너와 콜라보한 자전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앙드레김 선생님을 상징하는 하얀 바탕에 핑크, 오렌지색 같은 화려한 컬러와 꽃무늬, 나무줄기, 용 무늬 같은 시그니처 패턴이 들어갔습니다. 아쉽게도 앙드레김 선생님께서 별세하면서 제품은 단종되었고 소장 가치가 더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국내 최초 전기 자전거 출시
이뿐만 아니라 삼천리 자전거는 자전거 영역에서 계속 연구개발을 하여 2010년 국내 최초의 전기자전거 A1을 출시합니다. 그동안은 연구개발을 하면서 전기 자전거를 시범으로만 선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녹색 자전거 시대를 선포하고 자전거 도로가 많이 증가하면서 자전거를 빠르게 상용화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배터리도 묵직하고 오래가지는 않았는데 개발을 거듭해서 제품이 나아졌고 2013년에는 팬텀이라는 브랜드를 새로 선보입니다. 현재 팬텀이라는 브랜드로 나오는 제품 중에는 전기자전거뿐만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퍼스널 모빌리티(PM) 즉, 전동으로 가는 탈 것들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있습니다. 또 공유 자전거도 삼천리 팬텀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삼천리는 자전거가 여가가 되면서 레저 문화 산업에도 진심이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에 국내 산에서 타는 마운팅 바이크가 소개되면서 MTB 인구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1993년 또다시 국내 최초로 산악자전거 대회를 개최합니다. 김철호 회장의 호를 따서 학산대 자전거 산악자전거 대회라고 불렸습니다. MTB 인구가 늘어나면서 삼천리는 전문 산악자전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MTV는 거의 수입에 의존했는데 삼처리 자전거가 첼로라는 자회사를 만들어서 고급 자전거 시장을 엽니다. 각 부품별로 티타늄 같은 최고급 소재를 쓰고 소비자의 체형에 맞게 디자인하여 적게는 500만 원에서 최고 2천만 원 까지 자동차 가격을 호가하는 제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여가 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여행입니다. 자전거 제조뿐만 아니라 레저 문화가 더 확산되기를 바라면서 1999년 참 좋은 여행사를 계열사로 만들어 여행과 연결시키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팬데믹 시기에는 여행을 갈 수 없었지만 삼천리 자전거는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자전거야말로 인구가 밀집하지 않은 곳에 가서 혼자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기 때문입니다. 또 이 시기에 배달이 늘어나면서 배달 자전거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배달하면 오토바이를 먼저 생각하지만 팬데믹 때 배달 플랫폼들이 누구나 배달을 할 수 있도록 열어주면서 자전거 배달원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유럽에서는 자전거 배달이 오토바이 배달만큼 많습니다. 자전거는 소음이 없기 때문에 주택가에서도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고가 날 위험도 적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전거 배달 시간도 느리지 않다고 합니다. 팬데믹 때는 특수를 누렸던 자전거 업계는 최근 실적이 주춤하다고 합니다. PM 같이 다양한 방면으로 신사업 기회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국민의 두발을 대신해서 달려준 자전거 앞으로도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