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원은 두부로 사업을 시작해서 유명해진 기업이지만, 그 시작부터 김치도 함께 만들어왔습니다. 특히 유산균 기술 특허로 만들어진 '톡톡 김치'는 큰 인기를 얻었으며, 미국 시장에서 김치 판매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교포 사회뿐만 아니라 월마트에서도 1등을 차지한 브랜드입니다. 김치냉장고도 자체적으로 제작하고 검증하고, 인사동에는 풀무원이 운영하는 김치박물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바른 먹거리를 만든다는 이념으로 김치뿐만 아니라 다양한 식품을 만드는 친환경 기업 풀무원 이야기 들려드리겠습니다.
풀무원이 최초로 시작한 유기농법
'풀무원 농장'을 만든 원경선은 1914년 평양에서 태어납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첫아들을 잃고, 여러 가지 풍파를 겪으면서 뿌린 대로 거두는 농사가 가장 정직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래서 마흔이 넘은 나이에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라 자급자족하는 농사 공동체를 만든 것이 바로 '풀무원 농장'입니다. 그는 6.25 전쟁 이후 전쟁고아와 가족을 잃은 노인들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구호시설을 만들려는 목적이 아니라 함께 농사를 지어먹으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 것입니다. 원경선은 농사만 지은 것이 아니라 생산력 향상 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습니다. 새로운 종자가 보급되면 먼저 받아들이고 실험도 해보고 그 결과도 나눕니다. 또 한국 최초로 유기농 농사법을 도입합니다. 해외 자료를 찾아보며 농사를 연구하던 중 '농약과 화학비료는 간접 살인이다.'라는 기사를 접합니다. 당시만 해도 농약과 화학 비료 없이 농사를 짓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면 생산은 증대할 수 있지만, 환경이 오염되어 인간에게도 좋지 않고, 생태계도 파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원경선은 일본에 유기농을 정착시킨 애농회 대표 '고다니 준이치' 선생을 한국으로 초대해서 유기농 농사 비법을 전수받게 됩니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유기농 단체인 정농회를 발족합니다. 하지만 유기농 농사법은 농작물이 잘 크지도 않고, 벌레를 하나하나 손으로 잡아야 하는 수고가 뒤따랐습니다. 또한 유기농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시절이라 판매할 수 있는 유기농 시장 자체가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아들인 원혜영이 판로를 만듭니다. 원혜영은 서울대에 입학을 했지만 학생운동에 참여하는 바람에 취직이 어려웠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생산한 유기농 농산물의 가치를 인정해 줄 수 있는 부유층이 모여 사는 서울의 압구정동에 풀무원 농산물 직판장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농장에서도 농산물을 가져오고 유기농협회인 정농회 회원들의 다양한 농산물을 취급합니다.
바른 먹거리 풀무원의 다양한 시도
하지만 유기농만 판매해서는 다양한 채소 상품 구색을 갖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게 바로 두부와 콩나물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가정의 식사에 오르는 대표 반찬이 두부와 콩나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원혜영은 무공해 콩나물과 두부를 생산하기로 합니다. 가격은 수입산의 3배 비쌌지만 국산 콩을 썼고, 콩나물도 성장 촉진제를 안 쓰다 보니까 가격이 비싸졌습니다. 그래서 여의도나 강남처럼 고소득 가정이 밀집된 지역이나 백화점에서만 판매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네모형 플라스틱 포장도 처음 개발해서 국내 최초의 포장 두부를 선보였습니다. 국내 최초로 두부와 콩나물을 포장해서 안전하게 유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깨끗하고 안전한 유통을 시도했지만, 신선식품은 하루라도 날짜가 지나면 폐기해야 했기 때문에 이익을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원혜영은 고민 끝에 고등학교 동창 남승우를 찾아갑니다. 남승우에게 투자받고 투자자들까지 모집해서 풀무원 효소식품을 세우고 함께 제품 개발에 매진합니다. 이후 풀무원 건강 레이디즈라는 세일즈 조직도 구축합니다. 결국 1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기면서 회사가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후 원혜영은 자신의 모든 지분을 남승우에게 양도하고 회사를 떠납니다. 그리고 본인은 학생운동을 할 때부터 뜻이 있던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합니다.
풀무원 경영진의 세대교체
이때부터 작은 식품 가게였던 풀무원을 성공적으로 자리 잡고 키운 건 남승우 대표입니다. 남승우는 친구인 원경선의 아버지 뜻을 이어서 로하스 철학을 그대로 이어갑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건강하고 지속 가능하게 친환경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2002년에는 국내 최초의 유기농 두부를, 2009년에는 첨가물을 전혀 넣지 않은 천연 간수 포장두부도 선보입니다. 그리고 점차 두부뿐만 아니라 나물 등의 신선식품과 생면 같은 가공식품으로 제품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한국 최초로 동물복지 유정란을 선보였습니다. 또한 식품업계 최초로 농산물의 모든 정보를 소비자와 공유하는 생산 이력제를 도입했습니다. 또 유통기한과 제조 일자 병행 표기도 풀무원이 처음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국내보다 더 엄격한 글로벌 기준의 첨가물 115종을 자율적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소비자들은 풀무원의 '바른 먹거리' 부심을 알아봤고 풀무원의 매출은 2조 원대로 커졌습니다. 그러던 중 2017년 남승우 대표는 깜짝 선언을 합니다. 바로 33년 만에 은퇴 선언이었는데, 당시 세상이 놀랐던 건 자녀들에게 전혀 승계하지 않고 전문 경영인 체제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남 대표의 뒤를 이은 이효율 대표는 1983년 회사가 아주 작을 때 입사한 사원 1호입니다. 그동안 34년 동안 마케팅 영업 해외 사업 등 모든 직무를 역임하면서 함께 성장해 온 사람이 대표를 맡은 겁니다. 이효율 대표가 선임이 된 후에는 신선식품뿐만 아니라 HMR(Home Meal Replacement) 가정식 대체 식품을 출시하면서 상품을 더욱 다각화했습니다.
풀무원의 해외진출
풀무원을 식품업계의 대기업으로 키워내는 데는 해외 진출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91년부터 미국 시장에 진출했고, 초반에는 누적된 적자가 엄청났지만 꾸준히 투자했습니다. 풀무원은 미국에서는 나소야(Nasoya)라는 브랜드로 제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미국 시장에서 무엇보다 인기 있는 제품은 두부입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 육류의 대체품 수요가 증가했는데 2020년에는 미국의 두부 수요가 40%나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풀무원의 미국 공장은 그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서 한국에서 매달 100만 모의 두부를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풀무원은 미국 두부 시장의 67%를 차지하면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2020년 핫바처럼 생긴 두부바를 선보였는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중국에서도 풀무원이 한국 두부 카테고리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이렇게 두부가 사랑받기 시작했지만, 한국에서는 두부가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MZ세대에게 새로운 식품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콩과 두부로 새로운 식재료를 선보인 것이 바로 비건 브랜드 '지구 식단'입니다. 요즘은 다이어트를 많이 하면서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지구 식단'은 콩으로 대체육을 만들거나 면, 식물성 런천미트까지 만듭니다. 그리고 밥 대신 두부면을 넣어서 만든 키토 김밥이나, 떡볶이에 떡 대신 쫄깃한 두부를 넣어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풀무원은 여전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어서 2023년 처음으로 매출이 3조 원을 초과했습니다. 이렇게 매출이 잘 나오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항상 영업이익률은 2%대로 낮은 편입니다. 이것이 경영진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영업이익률이 낮은 것은 식자재 퀄리티를 높다는 뜻이기 때문에 소비자로서는 너무나 감사한 기업입니다. 원경선 농부 할아버지의 초심이 계속 이어지는 믿음이 가는 기업 풀무원이 세계로 뻗어나가 한국 대표 기업으로 오래오래 계속되길 바랍니다.